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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받는 미얀마 민주화 항쟁, 잔혹한 군정의 역사

by 공릉 2022.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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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고 1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넓은 국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약소국인 미얀마의 국민들은 맨 손으로 군부에 맞서며,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미얀마 국민들을 돕는 것이 자국에 아무런 이익이 생기지 않는다고 판단한 강대국들은 어느 누구도 미얀마 국민들의 외침에 응답할 생각이 없다.

1988년 민주화 시위를 미얀마 군부는 3천여 명이나 학살하면서 진압했다. 13개월이나 항쟁을 벌이고 있는 이번 민주화 시위에서 이미 몇 명이나 희생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몇 명이 더 죽어야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이 이뤄질지는 더더욱 모른다.


미얀마 민주화 항쟁과 미얀마 군정

#MyanmarNeverSilenced

(국제앰네스티는 전 세계 시민의 연대 메시지를 미얀마 시민에게 송출하는 캠페인 "#MyanmarNeverSilenced"을 진행 중)

 

안녕하세요, 빈씨 아재입니다. 

  •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두 번째로 큰 나라
  •  무려 70년이나 군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상에서 잊혀진 나라

 미얀마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빈씨 아재는 개인적으로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별다른 이유 없이 가슴이 아파옵니다. 미얀마의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와 조금 닮아 있어서 그런지, 외롭게 투쟁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또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다시 영국에게 점령당하는 등 오랜 기간 식민지 지배를 받다가 어렵게 독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군사 쿠데타로 군부가 정권을 잡고 독재를 일삼고 나라가 파탄날 지경에 이르자, 국민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한국은 비슷한 이야기의 끝이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미얀마는 아직 비극적인 위기가 진행되고 있고 어쩌면 새드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는 지경에 이르러 있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 항쟁을 지지하면서 포스팅을 시작하겠습니다.

미얀마-민주화-항쟁
한국이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출처 : 5.18기념재단, 앰네스티)

미얀마 개요

  •  인구 : 약 5,360만명(2017년 인구조사, 부정 선거로 인해 선거 때마다 인구보다 많은 유권자수를 기록)
  • 국토 면적 : 676,577㎢ (세계 40위로 아프가니스탄보다 약간 큼)
  • 수도 : 네삐도 (양곤은 최대 도시이자 경제 중심지)
  • 종교 : 국민의 89.4%가 테라바다 불교(Theravada Buddhism ; 한국으로 치면, 소승 불교) 신자
  • 언어 : 공용어는 미얀마어(소수민족들의 언어 총 242개) 
  • 민족 구성 : 저지대에 거주하는 버마족(Burman)이 전체 인구의 68% 차지, 135개의 민족들이 있음.
  •                (대략, 샨족 10%,, 카렌족 7%, 리카인족 4%, 중국 화교 3%, 몬족 2% 등등)

미얀마-지도
미얀마 지도(출처 : 구글 지도)

미얀마 군사정권의 역사

미얀마의 비극의 중심에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잘 알 듯이 "군부"가 있습니다. 미얀마의 근현대사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약술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너무 길면 지루하고 너무 짧으면 중요한 내용이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 점 감안해서 봐주세요.)

* 미얀마 독립

-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 19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미얀마의 예전 국명)는 1930년대부터 '타킨당'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항쟁을 시작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아웅산'과 '네윈'이다.(아웅산은 아웅상 수치의 아버지) 이들은 일본, 중국, 태국 등의 도움을 받아 버마 독립 의용군을 훈련시키고, 일본에서 '30인의 동지'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

- 1940년에 들어 세계 2차 대전이 확산되고 일본이 참전하면서, 일본은 1942년 3월 타킨당과 버마독립의용군을 앞세워 버마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미얀마를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

- 아웅산과 네윈을 비롯한 '30인의 동지'들은 영국보다 악질적인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1944년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하여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함께 일본에 저항했고, 1945년 8월 일본의 2차 대전 패전으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 하지만, 영국은 1945년 10월 일본을 몰아낸 공적을 앞세워 다시 미얀마를 지배했다.

- 1946년 하반기에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이 2차 대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더 이상 식민지를 무력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 당시 인민자유동맹의 총재였던 아웅산은 1947년 1월 영국의 런던에서 영국 노동당 애틀리 총리와 담판을 벌여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고 미얀마의 독립을 선포했다.(완전 독립은 양 국의 협정에 따라 1년 후인 1948년 1월 4일 완성)

아웅산
아웅산 (출처 : 위키피디아)

* 미얀마 비극의 시작, 아웅산 암살과 네윈 군사 정권의 탄생

- 미얀마의 독립이 확정된 후, 국민들에게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던 아웅산과 네윈은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 아웅산은 1947년 4월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하여 총리가 됐으나, 동년 7월 친영파와 네윈파의 암살범들에게 각료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살해됐다. 후임 총리는 우 누가 취임했고 우 누는 1962년 쿠데타로 실각했다

- 62년 쿠데타 당시 미얀마는 인민자유연맹의 분열과 부정부패 문제, 연방 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 실패, 정부의 종교의 자유화 정책에 불교도들이 극렬 저항,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 내전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독립 영웅인 네윈의 강력한 리더십은 미얀마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 1962년 쿠데타에 성공한 네윈은 사회주의계획당을 앞세워 버마 내 민간 자본을 모두 국유화하고, 엄정한 중립 외교 노선을 택하는 이른바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를 선언했다. 

 

* 네윈의 군사 정권기

- 네윈은 중립 외교 정책을 강화하여 쇄국정책을 실시했고, 1974년 버마 사회주의 연방(The Socialist Republic of the Union of Burma)의 근간이 되는 헌법을 공포하며, 사회주의계획당( BSPP ; Burma Socialist Program Party)의 일당 의회 체제를 수립했다.

-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는 자급자족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잘 돌아가지 않았고, 소수민족과 중국을 등에 업은 공산반군들과의 내전도 끊이지 않아 미얀마는 아시아의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네윈
네윈 (출처 : 조선일보)

* 8888 항쟁, 국민 저항의 시작

- 네윈 군사정권은 계속 어려워지기만 하는 경제 회생을 위해 1987년 농산물의 거래를 일부 자유화하고, 35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갚을 길이 없게 되자 UN에 버마를 외채 조정을 포함하여 최우선 원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빈국(LLDC)으로 분류해 줄 것을 요청하여 UN 지정 최빈국이 되었다. 네윈은 책임을 진다는 모양새로 1988년 7월 권좌에서 물러났다.

- 군사정권의 억압과 경제 파탄에 미얀마 국민들은 급기야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민중항쟁’으로 궐기했다.

- 하지만 1988년 9월, 네윈의 측근인 국방장관 소우 마웅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8888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약 3천여 명이 숨지고 1만여 명이 실종됐다.  그리고, 신군부는 1989년 시민 폭동의 책임을 물어 아웅산 수치를 자택 연금에 처했다다.

- 신군부는 경제 성장을 위하여 1988년 11월 외국인투자법을 제정하고 1989년 국명도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 미얀마 연방으로 바꾸었다.

- 신군부는 이후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90년 5월 수치가 이끌던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의석 80%를 확보한 총선을 무효화했다. 신군부는 2011년까지 독재를 계속했다.

 

* 2007년 샤프론 혁명과 현법 개정

- 2007년 신군부가 8월 15일 예고도 없이 천연가스 가격을 기존보다 약 5배, 기름 가격을 2배 인상한 조치에 반발하면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일부 승려들이 시위에 참여하여 군부에 체포당하자 승려들도 군부에 맞섰고 시민들과 함께 투쟁에 나섰다. (승려들이 샤프론 색의 옷을 입는다고 하여 샤프론 혁명이라고 부른다.)

- 샤프론 혁명은 최소 30여 명, 최대 200여 명이 숨지는 희생을 치렀지만, 신군부에게 일부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신군부는 총선 실시를 약속했고, 민간 정부 수립을 다시 한번 약속했다.

- 하지만, 2008년 신군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다음의 조건을 추가하여 헌법에 의한 군부 독재를 완성하였다.

의회 양 원(민족원과 인민원)의 25%를 군부에 배정

군총사령관이 국방, 안보 내무, 국경 장관 직접 지명

국가 비상시 군총사령관이 자동적으로 정치권력 장악

헌법 개정은 의회의 75% 찬성,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국민 투표로 75% 이상을 얻어야 함

- 그리고, 배우자나 자녀, 자녀의 배우자가 외국인이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도 만들어서 아웅산 수치의 대통령 출마를 원천 차단했다. (수치의 배우자가 영국인)

- 2010년 총선은 수치의 민주주의 민족동맹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신군부는 21년만에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 하지만 2015년 총선에서 양 원 선출직 의석의 약 79%(491석 중 390석)를 수치의 민주주의민족동맹이 가져갔다. 

- 수치는 2016년부터 외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 장관을 겸임하면서 실질적인 국가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웅산-수치
아웅산 수치 (출처 : 위키백과)

* 2020년 총선 결과 불복과 3번째 쿠데타 발생

- 2020년 총선거에서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주의 연맹이 양 원의 83.2%에 달하는 의석(476석 중 396석)을 획득, 이전보다 더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하자, 군부는 부정 선거가 있었다면서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군사 쿠데타와 관련된 소문이 퍼졌다. (민족원과 인민원 정원은 664명, 헌법에 의해 25%인 166명은 군부에 할당. 민족원 161명, 인민원 315명 등 총 476명을 선출)

- 그리고 2021년 2월 1일 쿠데타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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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는 자국민들에게 어떻게 이런 무자비한 진압을 할 수 있을까?

2022년 3월 말까지 미얀마 인권단체들이 집계한 군부 쿠데타 희생자 수는 1723명, 군에 잡혀간 사람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는 미얀마 외곽 지역의 소수민족 희생자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국의 시민단체 ‘미얀마 책임 규명 프로젝트(MAP, Myanmar Accountability Project)"는 전체 희생자 수는 집계된 것보다 적어도 2배는 많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얀마-군부-학살범
국민 학살범, 민 아웅 훌라밍

이번 쿠데타의 주범인 '민 아웅 흘라잉'은 군과 행정부(미얀마 연방 공화국 국군 최고사령관 겸 미얀마 연방공화국 국가행정위원회 의장 겸 미얀마 연방공화국 과도정부 국무총리)를 모두 장악한 채, 45만 명에 달하는 정규군과 20여 만 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서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를 학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1년이 넘도록...  

 

그럼, 왜 미얀마 국민들이 '타르마도(버마어로 '무장한 군대')'라고 부르는 미얀마 군은 민주화를 외치는 국민들을 이토록 잔혹하게 학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자신들의 모든 부귀영화가 걸려 있는 싸움이라고 해도 국민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군대가 비무장 자국민을 이렇게 오랜 시간 학살을 지속하다니,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의 3가지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 진압군
미얀마 진압군 (출처 : 로이터 통신)

70년 넘게  지속되는 소수민족들과의 오랜 내전과 학살을 반복해 온 경험

미얀마 군은 1948년 독립하기 전부터 분리독립을 시도하는 소수민족 군벌들과 싸워왔고, 지금도 로힝야족, 카렌족, 카친족, 샨족 등과 70년이 넘도록 내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전 세계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내전을 지속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토록 오래 내전이 지속되기 때문에 내전 중에 희생된 정확한 민간인 수가 집계되어 있지는 않지만, UN이나 국제 인권단체들이 집계한 바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016년 시작된 로힝야족 학살 사건 때는 2017년 한 해에만 2만 5000천 명이 넘는 로힝야족이 학살당했고, 1995년~1997년 카렌족과의 내전의 민간인 희생자만 1만여 명에 달하며, 지난 10년 간 미얀마 군의 기습 작전에 희생된 샨족 중 민간인의 수는 1,88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미얀마 군인들에게 살인은 그저 일상일 뿐입니다.

 

70년 넘게 군이 국민을 통제해 온 '군민 통제'의 경험

미얀마의 군대는 대부분 버마족 출신으로, 군인들은 스스로를 국가를 지탱해 나가는 엘리트이며 군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는 사상이 투철합니다. 또한 군인들은 '타르마도(군대)'가 미얀마의 독립을 쟁취했고, 미얀마가 국가로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타르마도의 헌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자들은 모두 적이고 죽어 마땅하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트 의식을 바탕으로 70년 간 국민들을 탄압하고 통제해 온 군대의 경험은, 같은 버마민이라 할 지라도 군에 거역하면 모두 반역자, 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발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얀마 군은 미얀마 안의 특권 계급이자 지배 계급

미얀마 군은 사병들은 징집제이지만, 장교는 2개의 장교 양성 학교에서 배출됩니다. 장교의 대부분은 군인(장교) 집안 출신이고 이들은 결혼도 군인 집안끼리만 해서 일반 미얀마 국민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은 누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항상 벌어지는 내전으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사자들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만, 지금은 군인 집안 출신인데 일반 국민과 결혼하는 사람은 가족에서 제외시키고 인연을 끊거나 배신자로 낙인찍어 군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에는 취업을 못하게 하는 짓거리도 횡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군 고위층에게 충성을 다하는 대가로 평생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고 있어, 제대를 하더라도 군이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이나 공공 기업에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군에 복무하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세습할 수도 있습니다.

미얀마-시위하는-시민
왠지 미안... (출처 : 앰네스티)

멀어져만 가는 미얀마 민주화의 꿈...

미얀마의 옛 수도인 '랑군'(버마어로 '양곤')은 버마어로 ‘적의 소멸, 전쟁의 끝’을 의미합니다. 과거 버마 국민들은 길고 길었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다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수도의 이름을 '랑군'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얀마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랑군을 비롯한 미얀마 전역은 버마인들 간의 전쟁 상황이고, 민주화의 꿈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합니다.

 

미얀마 군부는 절대 자신들이 쌓아 올린 국가 지배 시스템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유일하게 미얀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미얀마 군부의 실권을 바라지 않습니다.

 

미얀마 군부의 경제 지배 양 대 축

미얀마 군부는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미얀마경제지주사(MEHL ; Myanma Economic Holdings Public Company Limited)'와 '미얀마경제공사(MEC ; Myanmar Economic Corporation)'를 통해 미얀마의 경제를 지배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경제지주사(MEHL)는 미얀마 최대 은행인 마이와디 은행을 소유하고 있어 군 연기금을 운영하고, 외국자본 투자 사업 역시 대부분 관여하고 있으며, 미얀마의 대표적인 보석들인 루비, 사파이어, 옥 등의 시장을 독점하면서도 큰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얀마 군부는 맥주 회사도 미얀마경제지주사의 자회사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경제공사(MEC ; Myanmar Economic Corporation)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지하 자원인 천연가스, 주석, 텅스텐 등의 수출을 독점하고 있으며, 통신사인 Star High Public Company와 Myanmar National Telecom Holding Public(MNTH)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미국 재무부는 MEC가 "광업, 제조, 통신 분야뿐만 아니라 군에 천연자원을 공급하고, 군납용 물품 제조 업체를 운영하는 지주회사"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라지 않는 중국

미얀마는 외국 자본에 시장 개방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아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낮습니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이 미얀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수출로 보면 10% 정도이고, 외국인 투자에서도 영국을 제외하면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서방의 경제 제재나 외교적인 압력은 거의 효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미얀마에 대한 외국인 투자 비중과 수출입 물량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은 미얀마 군부에 대해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이 미얀마 군부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중국은 중국과 같은 일당 독재 사회주의 국가였던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미얀마 군부가 실각하여 힘을 잃게 된 후, 미얀마 내의 소수민족들이 줄지어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상황도 절대 받아들이 수가 없습니다. 민주화나 소수민족 문제는 미얀마에서 시작된 불길이 중국으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중국은 미얀마 구테타 정부를 강대국 중 유일하게 외교 파트너로서 인정했고, 미얀마에 지속적으로 중국제 무기를 수출하고 있으며, 북부 소수 민족 난민들의 중국 입국을 절대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 항쟁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얀마 국민들의 힘만으로 군부를 물리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로 쏠려 있는 사이, 우리는 미얀마에서도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더 눈을 돌리고, 응원을 해야 합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기원하며, 더 이상 누군가 살해당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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